2012/05/14 12:44

아주 늦은 공연 후기, 세밑의 두 남자 듣musique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중학교 3학년 말, 연합 고사가 끝나고였거나 연합 고사를 위해 밤샘 공부 중이었거나. 암튼 라디오를 듣는 일은 요즘의 내가 TV를 보는 일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일과였고,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떤 프로에서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비가 좋아요' 가 나왔고 순간 내가 엄청 집중했던 기억이 난다. 97년의 겨울. 나는 조규찬에게 유난스럽게 빠져들었다. 

  그때로부터 15년째 팬임을 자처하면서도 공연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공연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깜짝 선물로 다녀왔다. 어떤 충격적인 춤사위도 게스트도 없는 두 시간의 공연. 조곤한 말투에 조곤한 노래. 외려 무대가 앨범보다 얌전할 수도 있구나. 웬만한 팬이 아니고서는, 뭐 이렇게 재미 없는 공연이 다 있어, 제법 툴툴거릴 만도 했다. 발차기나 걸그룹 코스프레 쯤은 해 줘야 연말 공연이지, 싶은 분들께는 안타깝게도 이런 불친절한 공연이 없었을 것. 고지식했던 두 시간.  

  1집에 있는 추억 #1은 꼭 듣고 싶었는데  안 불러 줬다. 우리가 함께 거닐던 그 하얀  거리를 잊을 수 있을까, 이 가사 정말 좋아하는데. 그러고 보니 총 9집까지의 정규 앨범 중 1집 빼고 각 앨범 당 한 곡씩은 불렀던 것 같네. '새 바람이 오는 그늘' 때 노래랑 '조트리오' 때 곡도 하나씩 불러 줬다. 그렇게 한 두 곡씩만 골라 불러도 두 시간. 앳된 얼굴 무색하게 그이의 나이가 불혹을 넘겼으며 데뷔한 지도 20년이 넘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모든 노래를 두 시간 내내 따라 부른 나 역시 중딩 소녀에서 이렇게 나이를 먹었구나, 실감. 앵콜곡은 데미안 라이스의 blower's daughter를. 우리가 동시대를 함께 나이 들며 살아가고 있구나. 마음이 차분해졌다. 팬레터라는 걸 쓰며 가슴 설레하던 그 소녀, 벌써 삼십 대구나. 탄식이 아니라, 이제야 과거 타령하는 데 조금의 자격이 생긴 거 아닐까 싶어 마음이 여유로워졌다고나 할까.


  일주일 후 또 다른 공연이 있었다. 성지 순례를 하는 기분이었던 조규찬의 콘서트와는 전혀 달랐던 백현진의 공연 <보고 듣는다>. 1부에선 박해일과 오광록 아저씨 주연의 '영원한 농담'이라는 영화를 먼저 보여 줬다. 웃기고 슬펐고, 좀 울렁거렸다. 화면이 흔들려서 그랬나. 어질어질.  다음에 제주도에 가면 그들처럼 해삼에 사이다를 먹어 봐야지. 
  영화가 끝난 후엔 노스페이스 계급도에서 '대장'에 해당한다는 노란색 패딩을 위에 걸치고, 아랫도리는 없이 속옷만 입은 백현진이 등장했다. 반바지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말이 안 된다. 무반주 독창회라더니 정말 반주 없이 노래를 시작한 백현진은 노스페이스 주머니에서 바지를 꺼내 입기 시작했단 말이다. 바지 위에 바지를 입는 진정성 없는 짓은 백현진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나는 그 실종 직전의 하의가 반바지가 아닌 속옷이라 주장하는 바이다. 암튼 바지를 입은 백현진은 노스페이스를 벗었다가, 아이폰의 메트로놈 어플을 실행한 채로 노래를 하기도 하였다. 오줌이 마려운 양 다리를 베베 꼬기도 하고, 신발을 벗기도 하고(신발은 부직포로 만든 장난감 같았다). 사람들이 박수를 칠 틈도 없이 그는 퇴장. 1부가 끝났다. 난 좀 어안이 벙벙했나. 속은 계속 울렁거렸다.

  밴드를 동반한 제대로 된 공연은 2부부터. 달파란, 방준석, 권병준을 소개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멘트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대에는 그의 노래에 등장할 법한 여러 가지 오브제들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한 편에는 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간이 침대가, 공중에는 전등이 달려 있었다. (아마도) 그의 방이었다. 실제로 백현진은 공연 중에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다 마시기도 하고 나중엔 침대에 누워 노래를 하기도 했다. 
  그는 '반성의 시간'과 '찰라의 기초'에 있었던 대부분의 노래를 불러 주었다, 쉼 없이. 진심으로 감동했다. 송구스러울 정도로 열성적인 공연이었다. 대충대충 귀찮은 듯 공연해도 나는 그러려니 봐 줄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한 선입견(과 애정)이 강했는데 어느 누구의 공연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 성실한 공연이었다. 한동안은 다른 공연 안 봐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만족감이 컸다. 연주도 조명도 탁월했다. 사람들은 좀처럼 박수를 치지 못했다. 역시 백현진. 공연마저도 독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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